원제 - The Spanish Cape Mystery, 1935
작가 - 엘러리 퀸
스페인 곶 미스터리 - 시간이 흘러도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수법만 진화할 뿐
어릴 적에 우리 집에는 청소년 용 추리 소설 모음집이 있었다. 홈즈, 루팡, 포와로, 펠 박사, 브라운 신부, 파일로 밴스, 뒤팽 등등 멋진 탐정들이 읽어도 읽어도 질리지 않은 기쁨을 주었다. 그 가운데 내 관심을 끈 것은 젊고 잘생기고 똑똑한 탐정들이었다. 예를 들면 파일로 밴스라든지 퀸이라든지. 지금 생각하면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다리미로 아무리 해도 펴지지 않을 흑역사지만, 그 당시는 막 혼자 그들의 이미지를 그리면서 그들만의 왓슨이 되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러니까 이 나이 들어서도 추리 소설 산다고 어머니는 뭐라고 하시지만, 어릴 때부터 그런 소양을 길러주신 건……. 음, 그냥 감사할 따름이다.
물론 그러다가 포와로가 더 멋져 보여서, 한동안 ‘헤이스팅스 꺼져! 내가 옆에 있을 거야!’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플 할머니가 좋아지기도 하고, 지금은 가가 형사가 마음에 들어오고.
하지만 어찌되었던 내가 처음으로 반한 소설 속의 인물을 엘러리 퀸이었다.
이번 편은 그의 국명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이다. 표지를 보고, 왜 망토가 그려져 있을까 의아해했다. 그러다가 영제를 보고 ‘아!’하고 이해했다. ‘cape’가 곶과 망토라는 뜻을 다 가지고 있으니까. 완전 말장난이다. 이 이야기는 바로 스페인 곳이라는 장소에서 일어난, 망토를 입고 발견된 시체의 이야기니까 말이다.
스페인 곶이라 이름 붙은, 한적한 바닷가 저택. 그곳에 묘하게 어울리지 않을 사람들이 초대되고, 손님 중 한 남자가 살해당한다. 옷이 다 벗겨지고 망토 하나만 걸친 채로. 게다가 전날, 저택 주인의 딸과 삼촌이 납치를 당한다. 삼촌은 살해당한 남자로 오인된 것. 그는 어디론가 끌려가고 딸만이 발견된다. 마침 옆 별장에 여름휴가를 보내러 온 엘러리와 매클린 판사. 경찰 조사 결과, 피해자는 부유한 여자들을 유혹해 관계를 갖고 협박해왔다는 것이 밝혀진다. 비밀을 갖고 있는 여자들과 그것을 밝히려는 경찰의 노력. 그리고 또다시 시작된 협박. 죽은 존 마르코의 숨겨진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등장인물 소개가 생각이 나서 웃어버렸다. 그에 대한 설명은 그냥 딱 세 글자였다.
악마님.
이번 이야기는 앞 권들과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랐다. 혹시 퀸 경감과 주나라는 엘러리를 붙잡아둘 고삐가 사라져서 일까? 아니면 살인 피해자가 원래 죽어 마땅한 악당이었고, 그에게 몸과 마음과 돈을 유린당한 연약한 피해자들이 너무 안쓰러워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혼자 열심히 논리적으로 사건에 대해 얘기하는 엘러리의 말이 와 닿지 않기 때문일까? 그것도 또 아니면, 설마 매끌매끌했던 예전 것들에 비해 책장이 약간 거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일까?
아, 어쩌면 내가 변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범죄자들이 저지른 죄에 비해 형량을 가볍게 받는 사회에서 살다보니, 차라리 법의 처벌에 맡길 바에는 죽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품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런 범죄자를 직접 처단하기로 한 사람의 심정이 이해가 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어쩌면 엘러리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책들과 달리 이번에는 범인을 지목할 때 분위기가 달랐다. 목이 메어 미안하다고 범인에게 사과를 한다.
‘발성기관에 문제라도 생긴 듯, 목멘 소리로 물었다.
(중간 생략)
“정말로 미안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쉬어 있었다.’ (p.428)
협박범의 정체는 대충 짐작이 갔지만, 범인이 그 사람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밝혀지고 보니, 또 그 사람이 어떻게 보면 아주 안쓰러웠다.
죽을 놈이 잘 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는 건 안 좋은 일이고, 그렇지만 그 놈은 살아봤자 피해만 주는 놈이고, 하지만 역시 개인적인 감정으로 처형을 하는 건 법치주의를 무시하는 것이고, 그런데 법이라는 것이 어떨 때는 저지른 죄에 비해 형량이 약하기도 하고, 그 놈이 저지른 죄는 악질이지만 공갈협박이라 금방 풀려날 것 같고 그러면 또 남에게 피해를 줄 것이고, 그러니까 죽이는 게 나을 수도 있겠지만 역시 함부로 사람의 목숨을……. 아, 복잡하다.
그렇게 따지면 남편에게 싫증을 느끼고 다른 남자와 놀아난 여자들도 문제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도 같이 즐긴 다음에 협박하는 건 좋지 않고, 그 남자는 여자들에게 계획적으로 접근을 해서 노린 거였으니 그 여자들이 불쌍하기도 하고, 하지만 역시 그녀들의 잘못도 있다고도 생각이 들고……. 역시 모르겠다. 이번은 엘러리 퀸 혼자 논리를 따지면서 상황을 정리하는 부분이 좀 많았다. 그렇지만 어쩐지 잘 따라갈 수가 없었다. 굳이 그렇게 따지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주저리주저리 읊는 그를 보면서 잠시 고민에 빠지기도 하고.
다른 국명 시리즈에도 남녀 관계가 주로 등장하긴 하지만, 이번처럼 처절하고 대놓고 주소재로 등장한 것은 처음인 것 같다. 그 전까지는 주로 곁다리 내지는 양념처럼 쓰였었는데 말이다.
책을 다 읽고 든 생각은, 1935년이나 2023년이나 사람들의 생각은 비슷하다는 것이다. 남을 꼬여서 약점을 잡아내 협박하는 범죄는 그 때나 지금이나 성행하고 있으니 말이다. 역시 인간의 본성이란 미스 마플 양의 말처럼 별로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아, 그 당시 왜 퀸을 좋아하다가 포와로로 갈아탔는지 이제야 생각났다. 퀸은 나중에 결혼을 한다. 나쁜 사람, 날 버리고. 차라리 죽을 때까지 독신이었던 포와로가 더 나아! 아마 이런 심리였던 것 같다. 하아, 부침개처럼 자주 뒤집히는 이 알량한 팬심이란, 진짜……. 유치하고 부끄럽고 한심하고.
그래, 그 때의 나는 질풍 노도의 사춘기 소녀였으니 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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